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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온전히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한국 복음 서원 출간, 간증 2집 중 감동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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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구출하려다 구출된 나

 

어려운 시기를 보낸 부모님

 

우리 가족과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믿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어머니가 믿음의 시초입니다.

나의 외할머니는 아들을 보시려고 딸을 일곱이나 낳으셨는데, 어머니가 막내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다섯 살 때부터 삼 년 동안이나 천연두를 앓았는데, 극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교 집안인 외가에서 어머니만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고 장로교 예배당에 다니셨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충청도 분으로서 4대 독자이십니다.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마저도 아버지가 젖을 떼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동네 사람들이 동냥젖을 먹여 키웠습니다. 청년 시절, 아버지는 도움을 주셨던 충청도 분이 대구에서 두부 장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 20여 일을 걸어서 대구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셨고, 나중에 주변 사람의 소개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응답 

 

나의 부모님은 딸 셋을 보셨는데, 일제 시대와 6.25전쟁 때 이사 다니는 와중에 딸 셋을 다 잃으셨습니다. 딸들이 연달아 죽자 어머니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아들을 하나 주소서.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제 아들이라고 생각하지않고 당신께 드리겠사오니 아들을 하나 주소서." 그런데 진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저의 형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형이 어릴 때부터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다. 너는 참되게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형이 어려서부터 너무 약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하나님, 아들을 주신것은 감사한데, 이번에는 튼튼한 아들을 하나 더 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저입니다.

 

어렸을 때 형이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 리어카에 가득 태우면, 나는 뒤에서 밀고 주일학교에 갔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서 인도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응답은 형에게서 이루어졌지만, 나도 튼튼한 아들로서 리어카를 밀면서 형과 동역을 했습니다.

 

답답하기만 했던 청년시절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인 형은 당연히 어려서부터 신학교를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일반 신학교를 다니면 공부하는 수준이 너무 낮을 거라고 생각하여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종교학과 동료들이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들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등의 이중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대구에 있는 의과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형은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형은 오히려 몰몬교나 힌두교 등 다른 종교 안에 참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른다며,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방황하니 나도 덩달아 방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기독교는 장로교조차 많은 파로 나누어져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이단이라는 단체들에도 가 보았는데, 그들은 비진리적이며 비성경적이었습니다. 각종 단체들을 가 보았고, 심령부흥회는 여기저기 다 찾아 다녔습니다. 나는 너무 답답하여 항상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은 내가 항상 흘겨본다고 오해를 하셔서 나를 때리곤 하였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어 유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내의 도장은 그 안에서 운동하다 상대방이 골절상을 입어도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 도장은 스트레스 해소에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유도부 주장을 맡으면서 운동을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여기저기 부흥회를 찾아다녔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장로교인으로 예배당에 성실하게 다니기만 하시는 어머니도 나에게 어떤 진리를 제시해 줄 수 없으셨습니다. 산 기도도 가고, 금식 기도를 하면 되는 줄 알고 주암산에 가서 금식도 해 보고, 심지어 달성 공원에 가서 극기 훈련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할때에도 "오,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십니까? 오, 하나님! 이 우주는 넓은데, 왜 내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까? 당신은 살아 계신 것 같은데, 내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는 말입니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한편 군대 생활을 하면서 사고를 낼 것만 같은 위기 때마다 "오, 하나님! 나는 여기에서 견딜수 없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그 때마다 보직이 바뀌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섬세하게 인도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제대한 후로 나는 성경을 읽을 때는 조금 해방되는 것을 느꼈지만, 성경에 언급된 인물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없어서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단 한 명이라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경제적인 여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책을 사지는 못하고 책방에 서서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만족함이 없고 오히려 답답함이 가중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나는 심지어 유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살했는지를 말해 주는 책들도 읽으면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지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이 우주 가운데 외톨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때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해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루 하루가 지겨운 나날들이었습니다.

 

형을 구출하려다 구출된 나

 

내 나이 이십 대 후반인 1972년, 장로교를 다녔던 집안 식구들은, 형이 이상한 교회에 빠졌다며 그곳에서 형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나에게 내렸습니다. 형은 많은 방황 끝에 대구에서 교사 모임의 리더였던 동창생인 안 자매님을 통해 대구 교회를 가게 되었고,  거기서 비로소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예전과 다르게 집에서도 자주 찬송을 부르고, 졸업하면서 받은 수석졸업 금메달조차도 주님께 헌금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형이 이상한 곳에 빠졌다며 나에게 형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린것 이었습니다.

 

나는 형을 구출하려고 대구 교회 소그룹 집회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비로소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와 똑같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도자도 없고 누구 한 사람 주도하지 않는데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나는 오늘 에베소서 6장에 있는 전신갑주를 누렸습니다." 등의 간증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나는, 내가 전에 가 본 적이 있던 이단들의 광경과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모임을 해산시켜 버리려고 단단히 벼르고 갔습니다. 내가 전에 가 본 이단들은 대개가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하면서 난리법석을 피웠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인격적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에게는 주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날 일기에 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다. 물론 일주일 후에는 내가 처음 본 인상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오늘 본 인상은 너무나 신선하다. 일주일 후에 실망감이 생길지라도, 내가 교회를 선택한다면 이 교회를 선택하겠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을 지켜보며 다녔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주님께 기도할때 나는 회개하고 통곡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고, 회개하며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빛 비춤을 받아 "주님이 내 모든 것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교회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는 형을 구출하러 간 녀석이 형과 똑같은 이단에 빠졌다고 그날로 쫓겨났습니다. 사실 그 전에 내 깊은 속에서 '내가 집을 나가야 식구들을 구원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가라고 하실때 마음 편하게 바로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역경 많은 교회생활

 

집에서 쫓겨난 뒤에 갈 곳이 없어서 한 공장을 찾아갔습니다. 공장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마침 안에서 "어이, 강재원 아닌가!" 하면서 초등학교 동창생이 새카만 얼굴로 달려 나왔습니다. 나는 체면 때문에 일하러 왔다고는 말을 못하고, 몇마디 하고는 나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운동하던 체육관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하면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겟지.' 라는 생각으로 예전에 운동했던 체육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관장님이 "강사범! 와서 식사하지."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이 내게는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그날 그렇게 밥을 얻어 먹고 체육관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주일날 관장님 아들을 대구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성당 다니는 아들을 교회로 데려간다고 관장님 사모님이 나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관장님은 나를 신뢰했기 때문에 다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대구 교회 유 형제(현재 정형외과 원장) 입니다. 결국은 사모님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나를 완전히 쫓아냈습니다.

그러던중에, 문교부 장관이 바뀌면서 체력장 제도가 생기는 바람에 체육교사가 부족하게 되어 나는 체육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교편 생활은 안중에도 없었고, 모든 것을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자주 사표를 냈고 직장을 여러 번 바꿨습니다. 직업이 계속 바뀌다 보니 간증이 안 되었습니다. 대전에서 특별 집회가 있을 때, 권 형제님이 "강재원 형제는 직장을 자주 옮기면 교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한 직장에 십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삼 년은 버텨야 한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1976년에 새로 들어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직장은 십 년이나 머물게 되었습니다. 1985년도에 잠깐 서울에 올라와 있게 되었는데, 대구 교회 성도들이 내 짐을 대구로 가지고 가버리는 바람에 대구로 다시 내려가서 교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회복

 

지난 삼십여 년간의 교회생활을 돌이켜 볼 때, 내가 간증할 수있는것은 주님의 회복의 영광은 교회생활에 문제가 있든 없든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약화되지 않고 계속 강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나는 모르지만, 주님의 회복의 영광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합니다.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은 것 같이 덮어 버립니다. 마치 공중에 지구가 달려 있지만 어떤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처럼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회복의 영광은 갈수록 농도가 진하고, 갈수록 중량이 무거워지고, 갈수록 깊어지고, 갈수록 측량할 수 없고, 갈수록 비밀이 더 많고, 갈수록 더 놀라워서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측량할 수 없는' 이라는 말을 했다고 느껴집니다.

 

나는 전에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해야 할 일에 대해 분명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도 없습니다. 전에는 자신감도 있고 방법도 있고 대처할 힘도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단지 그냥 어떤 큰 힘에 의해 밀려다니는 것 같습니다. 자꾸 나이는 들고 주님께 빚은 늘어 가는데, 갚을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 늘어갑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주님의 회복에 들어 왔다가 떠나가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내가 한 가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단지 여기에 남아 있었을뿐인데 만사가 해결되고, 갑절로 채워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하여 나는 주님의 회복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어떠한 축복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에게 있어서 그분의 회복은 그분의 눈동자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회복의 영광은 에스겔서 에서처럼 척량을 받을수록 차올라서 우리 모두를 덮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지체들의 단점이 많이 보였는데, 갈수록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회복에 대하여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큰 일 작은 일, 이 지방 저 지방 다니면서 다 관여했는데, 이제는 감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고, 단지 주님의 회복이라고 하면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뿐입니다.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생겼지?' 라고 따지지 않고, 주님의 회복이라고 하면 먼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듭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하늘에 속한 높은 고압선 전류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흐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남은 일생을 더 깨어서 교회생활 안에서 전진하기 원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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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석님의 댓글

no_profile 한희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멘. 아멘....  하늘에 속한 높은 고압 전류 !!!!!  영광스러운 주님의 회복 !!!! 남은 일생을 더 깨어서 성도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이길을 달려가길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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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학님의 댓글

no_profile 임재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멘!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교회생활 안에 있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남은 일생 몸안에서 지체들과  섞기며, 주님앞에 이기는자로써  드려지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