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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온전히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

천년 왕국에서의 보상은 포기할수 있으나, 징계는 포기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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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초에 주님의 긍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벌써 21년이 지났습니다만, 너무도 변하지 않은 자신을 볼때, 주님과 지체들에게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몇년전에는, 자신을 볼때 아무래도 이기는 자가 되어 천년 왕국에서의 시대적인 보상을 받아, 왕노릇하기는 어려울것 같아, 보상을 포기하고, 이땅에서 적당히 교회 생활하리라 마음 먹은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봐야 하는데, 어둠에 빠져 분별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천년동안의 보상은 포기할수 있으나, 징계는 포기할수 없고, 피할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에게 임하신 주님의 책망과 사랑의 징계의 손길을 통하여, 다시금 돌이키고, 더이상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주님만 바라보며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라 달려가려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으로 부터 오는 강한 빛비추심으로, 감추어진, 자신의 기질과 교회 건축에 걸림이 되는 부분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을 접하게되어, 대구 교회 지체들과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쓰신 형제님의 동의를 얻어 옮겨 왔습니다.(다음 카페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갓맨 형제님 연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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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질과  인생 >

몇 분 지체들과 <생명의 체험과 성장> 이란 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기질(disposition)을 다루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질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리의 어떠함입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 자신을 부인하고'(마16:24) 라고 할 때 그 '너 자신'이 바로 이 기질을 함축한 단어입니다.

우선 그 과목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알아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중 하나는 그 본문 안에 쓰여진 소 제목의 핵심 단어들을 찾아내 열거해 보는 것입니다.   <생명, 기질, 유용성> <기질, 인생> <처리함> 

우리는 찬송을 한 곡 부르는 동안 각자 자신의 기질 중 처리되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후 말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한 사람씩... 우선 저부터 자신을 폭로시켰습니다. 저는 너무 영적입니다(too spiritual). 
그 다음엔 자동으로 한 마디씩 같은 고백들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너무 급해요. 저는 게을러요. 저는 장난을 잘 쳐요. 저는... 시간을 지키는 것에 민감해요. 저는 나 아니면 안 됩니다.... 

마치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우리의 존재 안에 깊숙히 자리잡은 이런 기질들(혈액형? 체질?...)..이것을 딱 잘라서 좋다 나쁘다 말하긴 어렵습니다. 누가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본 빛은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어떠한가? 그것이 몸을 건축하는데 어떠한가? 를 따져보면 '유용한지' 아니면 '장애'가 되는 것인지가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시간을 잘 지킨다'는 자매님은 늘 그것이 남편과 자녀들과 실갱이를 벌이는 원인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병적으로 집착한다는 말도 들었답니다. 이런 억울한 말이 또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 지키는 것때문에 갈등을 빚고 서먹해 지고 결국 마음이 상해버린다면,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서 열린 마음을 갖게하고 그 후 신성한 진리를 공급하는 것을 가리키는 목양은...물건너 간 것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라는 자평과 타평을 가지되 목양못하는 기질은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것인가요?
(오해가 없길 바라는데...여기서 시간을 잘 지킨다는 의미는 적어도 약속시간 10분 전에 약속한 그 장소에 미리 가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그런 정도의 집착을 포함한 말입니다.)

저는 '기질과 인생'이란 단락에 쓰여진 내용들이 많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못된 '성질머리'로 인하여 인생에 더 많은 고난이 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법과 양심으로 판결해야 하는 판사조차도 재판 당사자의 기질적인 반응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판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생이 고단하고 잘 안 풀린다 싶으면...내가 가진 기질과 안 풀리는 나의 인생은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도대체 기질이란 말은 무엇인지... 차분히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1.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 고 고백했습니다.

기질이 무엇인가? 기질은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나'가 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미 십자가에서 못박혀 끝났습니다.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실 생활 속에서는 '이기는 자들'의 이기는 삶을 통해 그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 남아 있듯이...
우리의 기질 역시 '나'와 함께 끝났지만, 실제 삶 속에서 매일 죽고, 매일 부인되는 자기 부인의 삶이 요구됩니다.

2. 며칠 전 새벽집회 후 차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여보 오늘이 며칠이지요? 오늘? 10월 27일인가? 오늘이 무슨 날이예요? ..그제서야 감이 왔습니다.

제게는 "이 부부는 앞으로 잘 살게 되아있싸" 로 들려왔던, 멋진 주례사를 듣던 날이었습니다. 예전같았으면 '하이 화이브'를 하자고 내민 손을 그냥 놔 두거나 아니면...'(죽고 부활한 사람이) 무슨 그런 날을 기억하고 그래!' 하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졌을 것입니다. 저의 '영적인 너무나 영적인' 기질대로 살았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기질대로 살았을 때 '그래 당신 참 영적이다'
라는 냉소적인 평가는 들었을지 모르나, 이미 다른 한쪽은 마음이 상해서 집안에 저기압이 감돌곤 했습니다. 내 멋대로 살고 신령한 대로 살았는데, 하나님의 경륜이나 몸의 건축은 커녕, 같이 사는 사람 하나를 목양도 못하는 그런 씁스름한 실패의 체험들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언제부턴가 제 안에 '그래 나는 지나치게 영적이야' 그리고 그런 기질은 부인되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3. 하이 화이브를 위해 내민 손을 맞 받아 친후, 우린 차 타고 오면서 지금까지 이십 수년 째 순적한 결혼생활을 하게 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먹고 누렸던 찬송가사 하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인성 지닌 한 아기는 전능 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아들 영존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축복 믿음으로 받을 때에      
        모든 약속 주 안에서 예가 되고 실제돼 (162장)

같이 사는 여자 마음 하나 만져주지 못하는 '영적인 기질'을 부인하고 조금만 호흡을 맞춰 주어도 이리도 행복해 지는 것을!

1. 언젠가 몇분 지체들에게 자신의 기질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상당수가 자기가 급하다 또는 게으르다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기질 중에서 소위 타이밍과 관련된 방면입니다.

세상 살아갈 때는 주변에 일이 있으면 후딱 해치우고 할일
놔 두고 가만이 있지를 못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이 더 환영 받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그런 급한 기질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즉 급히 무엇을  하다보니 실수가 많고 후회하게 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더 큰 문제는 마음대로 잘 안 될 때 안달을 함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주변사람도 들볶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2.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주고 또 주심으로, 사람인데 하나님의 생명을 살고 표현하는 한 무리를 이 땅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데는 급한 것도 문제고 게으른 것도 문제입니다. 만일 자신을 사는 것이라면 심지어 요령껏 잘 균형을 이루어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급하지도, 느리지도(게으르지도), 적당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정해진 일을 하는 것만이 옳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할 때 요한복음 7장 8절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3. 그렇다면 소위 내 때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때가 아니라 주님께 물어본 후 주님이 하라고 시키시는 바로 그 때입니다.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도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으로 합당한 때를 알고 그대로 사실 수 있었듯이, 우리도 주님을 먹고 그분께 지속적으로 묻는(영을 따라 사는) 생활을 통해 그분을 사는 것이 요구됩니다.

결혼 앞두고 아내될 자매에게 이런 비슷한 말을 했었습니다. "결혼 후 내게 무엇을 물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답변을 못 듣더라도 너무 답답해 하지 말라. 나도 나의 머리에게 여쭤보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늘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그 때는 최소한 그런 마음 자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관련된 어떤 결정에 있어서 소위 타이밍이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기 까지는 그후에도 여러번의 실패와 실수를 거처야 했습니다.

기질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아 가지고 나온 자신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그 기질을 토대로 후천적으로 다듬어진 어떤 존재를 중심으로 살아진 모습입니다.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급한가 아니면 느린가를 따진다면 급한 쪽으로 분류될만 합니다. 그리고 한번 이거다 싶으면 그쪽으로 황소처럼 뚜벅뚜벅가는 식입니다. 그래서 꾀를 내거나 기분따라 왔다 갔다 하지는 않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편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이런 저런 환경을 거치면서 인생 돌아가는 모습을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 바탕은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집 사람이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결혼 하고 얼마 안 있다가 생긴 일입니다.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상태에서 어느 날 소그룹을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아내와는 일체 의논도 없이 인도하시는 형제님에게 전시간 봉사자로 나오고 싶다는 말을 했답니다.

물론 꼭 그것만 바라보고 한 것은 아니나, 그래도 군대 마치고 대기업에 취직한 형제이니 이 사람과 결혼하면 밥은 먹겠지 했는데....  이게 왠 소리인고 한 것이지요. 그 당시는 주님과 교회를 만나서 개인적으로는 삼층천에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만
생각했지 가장으로서 가족이나 생활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또 그런 일이 본인이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는 복잡하게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또 그런 마음을 쓸만한 그릇도 못 되었습니다.

결국 그 형제님의 설득과 권면으로 그 당시에 곧 바로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아무튼 이런 기질의 소유자는 자기 주관이 강하고 융통성이 부족해서, 다양한 필요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교회봉사에는 적합치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봉사를 정말 하고 싶으면 그런 우직하고 고지식한 기질은 십자가에서 거절되고,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새 인격을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이후 이런 저런 환경을 통해서 저를 깊이 폭로시키셨습니다.그리고 어느 환경을 통해 타고날 때는 없던 그 무엇을 채워 넣으셨습니다.지금도 여전히 고지식하고, 우직하고, 단순하지만... 예전보다는 그래도 영적 감각이나 상황판단 능력 그리고 상대방의 상태를 헤아리는 감각이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최소한 제 기질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고, 변화된 인격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만으로 제인생에는 큰 변화가 생긴 셈입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이지요.

기질과 관련하여 최고의 인생을 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타고난 기질을 거스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름대로 자기가 영적으로 성숙했다거나 변화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시험이자 잣대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난 달에 산집회 올라가서 다룬, 리 형제님이 쓰신 책자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 몸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몸이 어디있는가? 많은 지체는 있으나 그몸은 없을 수 있다. 건축은 지체들이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합당한 구절은 연락하고(joined together)이다(엡4:16).

우리는 단지 교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우리는 특히 이 목적을 위하여 많이 기도해야한다. 주님이 우리를 함께 건축하도록 우리는 적어도 넷, 다섯, 여섯, 열 혹은 열두 명의 형제 자매들과 분명히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지체들과 교통해야 한다. 이것이 안전장치, 보호,강화 그리고 참된 지지이다. 형제 자매들이 이렇게 건축되고 있지 않으면 지방교회가 건축될 가능성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호를 따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연결되기를 배워야 한다...우리는 우리의 기호를 희생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남에게 복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깨어지고 건축되어야 한다.이것이 진정한 시험이다"(집회와 복음전파에서 섬기는 길, 43-45쪽)

예전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많이 듣고 읽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 또는 위기가 왔을 때 자기의 기질을 처리하는 식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적당히 회피하거나 걸쳐 놓는 식의 관계를 가져왔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근 한달 여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위 책 내용을 여러차례 읽고 묵상하는 중에 이 기질을 거스르고 다른 지체들과 참되게 연결(건축)하는 문제가 결코 피해서는 안 될 최대의 과제이자 시험이라는 점이 또렷하게 다가오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지방교회 건축은 이런 취지와 맥락에서 긴밀하게 연결된 지체들로 이뤄지며, 이것이 없으면 참된 몸의 건축은 없는 것이라는 위 본문에서의 지적에 깊이 아멘이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실제적으로 연결(건축)된 형제님들을 제 눈으로 본 것, 그리고 저 자신이 한 형제님과 위에서 말하는 수준과 비슷한 단계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드려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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